“내가 뭐라고 했지?” 아내의 고성이 성준을 깨웠다. 얼마 전 들은 인터넷방송이라 했다. 한참 열을 올리며 설명하던 아내가 급기야 성준을 다그쳤다. “학자들은 이게 문제야. 상대방 말은 전혀 안 듣고 자기 생각에 골몰해서 어디론가 가버리거든. 평생 그랬지.” 평생 그랬지라는 말이 성준의 뒤통수를 쳤다. 국정원 차장이라던가 홍모 씨의 그간 행적이 신통하다고, 그걸 알아야 내란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한다고 설명하던 아내가 역정을 냈다. 이 순간엔 질문이 효과적이다. “홍모 씨가 용산 지령을 다 털어놓는다는 거야?” 청문회장에서 울먹이던 군사령관들이 애처로워 한 말이었는데 그건 성준의 궁금증일 뿐이었다. “에휴, 말을 말아야지.” 아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육개장은 식었고 벌건 기름이 떠올랐다. 마침 과년한 딸이 현관을 들어서다가 싸늘해진 분위기를 보고 한마디 했다. “엥? 또 한판 했어?” 아, 고개를 끄덕이던 여성처럼 귀담아들었어야 했는데, 이젠 늦었음을 성준은 알아차렸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투항하세요라고 말했던가. 야당의 행태를 받아들일 수 없듯 집권당의 행적도 야바위꾼과 다름없는데, 뭐 굳이 세월의 효과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성준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자신의 한 표가 정치를 바꾸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렇다면 가정의 평화가 우선,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고 무조건 투항하는 것이 현명한 처신임을 어둑한 서재에 홀로 앉은 정치학자 성준은 몇 번 중얼거렸다.
드디어 투표일이 왔다. 책장을 건성으로 넘기던 성준은 냉랭함이 가시지 않은 아내를 달래 사이좋게 투표소로 향했다. 늦은 오후였다. 줄이 길었다. 투표용지는 하자 열전(瑕疵 列傳)이었다. 도장을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꼴통 보수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 성준은 기회주의적 도장을 꾹 눌렀다. 아내의 표정은 밝았다. 사소한 기대마저 버리고 다 내려놓은 사람의 표정이 here 그럴까. 성준은 이번만은 쉽게 답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단골 식당에 들렀다. 확실히 말해주리라. 아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목소리가 그럴까. “이번에는 사표, 여백에 찍었거든. 당신은?” 성준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투표를 마친 손님들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식당에 몰려들었다.
■ 작가의 말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찍을지를 두고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는 ‘정치학자 성준’에 자연스럽게 ‘사회학자 송호근’이 겹쳐진다. 스스로 무당파론자이자 비판론자라고 규정하고, 강연에선 양비론이 인기가 없다고 자조하는 장면이 더욱 그렇다.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는 이 시대 인물의 전형성을 상정한 것이지, 성준과 자신이 동일하지 않다고 했다. “윤동주의 시처럼 우물 속에 비친 자기는 자기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젊은 시절 무조건 진보에 표를 던지던 성준이 세월이 갈수록 성향이 바뀌는 걸 자신도 의아하게 여기는 대목은 어떨까. 송 교수는 “중도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과정”이라면서 “이념에 대한 세월 효과, 연령효과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월이 이념의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그런 양상과 징후가 짙다면 전형성에 해당하지요.”
대선이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선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지지하는 후보가 달라서 가족 구성원이 갈등하는 장면을 왜 송 교수는 다시 소환했을까. 그는 “단단하게 고착된 이념갈등이 수면 아래 가라앉은 것일 뿐, 물 위로 솟구칠 또 다른 계기를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지금 유권자들은 ‘관망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것. 그는 “정치가 이념갈등을 해소하는 예술이라 한다면, 지난 대선은 ‘분노의 극대화’를 부추기는 저급한 밴드왜건(bandwagon)이었다”고 날을 세웠다.
가족 간, 부부간 정치성향의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개념으로 긍정 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송 교수는 “한국의 진보·보수는 ‘정의의 쟁탈전’이기 때문에 부부간, 가족 간 영역 다툼을 촉발한다. 적대정치의 폐단에 한국인 모두가 참여하고 있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소설은 바로 이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국인의 정치 과몰입은 정치권이 부추긴 결과이고, 저급한 정치가 낳은 폐해다. 그 점을 시민들이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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